현재라는 작은 조각들이 모여

 

 

보안성분석평가연구실 박현준

 

DEFCON 컨퍼런스에 처음 참석했던 것은 2013년도였다. 당시 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모의 해킹과 침해사고분석이었는데 두 분야에 어설프게 발을 걸치고 있었을 뿐 전문성을 갖추진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매일매일 해킹과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학습하며 해커라는 명칭을 당당하게 내 이름 앞에 쓸 수 있는 날을 상상하곤 했다. 회사에서도 그런 노력을 조금은 알아준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DEFCON에 다녀오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했던가. DEFCON 이벤트 중 하나인 Open CTF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오라는 것이 회사가 내게 준 미션이었다. 컨퍼런스참석"이 아닌출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대부분의 DEFCON 참석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세션을 듣거나 인적 네트워킹을 할 동안 나는 2 3일 동안 호텔 방에서 CTF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호텔 방에 숱하게 널브러진 에너지 드링크의 힘이었을까. 운이 좋게도 “Warl0ck Gam3z” 라는 CTF에서 1위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면 부족으로 인해 기념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한 채 40도에 가까운 라스베이거스의 거리 벤치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고, 그날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의 첫 번째 DEFCON 컨퍼런스에 대한 기억은 그렇게 비행기-호텔 방-비행기라는 단편적인 몇 장면들만이 남아있다.

 

비록 육체적으로는 굉장히 힘들었지만, 첫 번째 DEFCON에서의 작은 성취가 현재까지의 나의 삶에 두 가지 큰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회사에 소속된엔지니어"가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해커"라는 정체성을 가져도 된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I am” 까기는 힘들더라도 “I can be”라고 스스로 선언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삶에 임할 때 많은 것들이 긍정적인 결과로 돌아오는 것을 그날 이후 경험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스스로가 꿈꾸고 상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한 발자국씩 나아갈 때 그것이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DEFCON을 참석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했던 아주 작은 상상 - DEFCON에서 언젠가 해커로서 발표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당시에는 잡히지도 않을 것만 같던 목표를 6년이 지난 2019년에 실현하게 된 것이다.

 

첫 번째 DEFCON 참석 이후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나는 회사에서 IoT 제품에 대한 취약점 분석업무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후 수년간의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Major Cloud Mobile SDK 사용으로 인한 취약점 연구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 연구 과정 중에 지도 교수님 및 여러 도움을 주신 분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며 프로그램과 문서를 다듬었고, 최종적으로는 CFP 심사를 거쳐 올해 DEFCON 27 DEMO LABS에서 연구결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DEFCON이 끝나고 상상했던 나의 모습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전 세계 해커들과 연구결과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연구원으로써 최고의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연구를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보겠다는 대학원 입학 당시의 심오한 포부는 몇 번의 논문리뷰를 거치면서 현실의 높은 벽을 깨닫게 되고, 학기가 진행될수록 자존감은 추락하기도 한다. 연구 실험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가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대학원 학생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SpaceX CEO인 일론 머스크는 왜 우주기술에 관심을 가지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많은 사람이 기술이 자연스럽게 발전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발전하는 것이다나는 보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정보보호대학원의 많은 학우 개개인들이 각 분야의 보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낮으로 매달리고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세계가 좀 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곳이 된다고 믿는다. 지금 당장은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현재라는 이름의 종잇조각들을 계속해서 붙여가다 보면, 언젠가는 한 발자국 떨어져 멋진 모자이크 작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품은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을 낫게 만드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